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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빠름 속에서 잊힌 느림의 가치를 말하다

by j책방j@★◁ 202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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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관련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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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음에 머무를 계절,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건축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삶의 흔적과 기억, 사람과 장소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폐교가 된 학교를 새롭게 리노베이션 하는 작업을 맡으면서, 공간에 깃든 시간과 사람의 감정들을 되짚는다. 말보다 행동이 많은 작품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머무름’의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름이라는 계절처럼, 이 소설은 조용히 그러나 깊이 독자의 마음속에 머문다.

조용한 여름, 오래도록 남는 이야기

‘여름’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그리움과 함께 찾아온다. 한낮의 더위보다 오히려 한낮이 끝나고 난 후의 기운, 해가 기울며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그런 느낌의 소설이다. 겉으로 보기엔 특별한 사건도, 격렬한 감정도 없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마음 어딘가가 조용히 흔들린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무엇을 보여주기보다, 무엇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작품은 ‘나’라는 인물이 폐교를 리노베이션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오래된 학교 건물에 담긴 시간의 흔적, 그곳에 남겨진 기억, 그리고 그 공간에 여전히 깃들어 있는 정서들이 조용히 흘러간다. 마쓰이에 마사시는 이 이야기를 통해 공간과 사람의 관계를 탐색한다. 공간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물리적 장소가 아니다. 누군가의 성장, 상처, 기쁨, 이별이 담긴 곳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 ‘흔적을 읽는 방식’에 있다. 주인공은 그 공간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의 무게를 존중하며 그 자취를 살린다. 그렇게 우리는 문득문득 책 속에서 오래전 자신의 학창 시절, 누군가와의 추억, 가만히 멍하니 바라보던 운동장을 떠올리게 된다. 마쓰이에 마사시는 ‘건축’을 통해 과거와 현재, 개인과 사회를 조용히 이어주는 실을 하나하나 꿰어 나간다. 그리고 그 실은 여름날처럼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마음속에 남는다.

 

공간에 머문 감정, 리노베이션이라는 삶의 비유

소설의 중심은 ‘폐교된 학교’다. 그리고 그 공간을 어떻게 다시 살릴 것인가 하는 건축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이야기의 큰 틀을 이룬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건축 이야기가 아니다. ‘리노베이션’이라는 단어는 곧 우리의 인생과 맞닿아 있다. 마쓰이에 마사시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시간과 감정, 사람과 공간의 교차점을 천천히 풀어낸다. 주인공은 이 학교에서 자라지 않았다. 그곳에 특별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건축가로서 그 공간을 맡았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공간에 스며들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낡은 나무 바닥이 내는 삐걱이는 소리, 칠이 벗겨진 벽, 교실 한구석에 남겨진 오래된 공책 한 권. 그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소중했던 것이다. 그런 감정의 무게를 아는 주인공은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그것을 존중하고, 남기며, 보완하려 한다. 이 과정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감정의 리노베이션과도 닮아 있다. 아픈 기억도, 지우고 싶은 과거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 위에 새로 덧칠을 하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과격하지 않다. 이 소설이 주는 위로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조용히,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깊이 있게 마음을 감싼다. 이야기 속엔 특별한 갈등도, 큰 반전도 없다. 그러나 읽는 사람마다 자신의 기억과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부모와 보냈던 시간, 또는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마사시는 독자와 소설 사이에 ‘삶의 틈’을 만들어 두고, 그 사이에 독자 자신이 들어설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 놓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는 이마다 다르게 느껴지고, 다르게 남는다.

 

계절처럼 스며든 문장, 기억으로 남는 이야기

누군가에겐 너무 조용하고 심심한 소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바로 이 소설의 진짜 매력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냉소나 요네자와 호노부의 미스터리와는 결이 다르다. 마사시는 말보다는 감정의 결을 건드리는 작가다. 그는 공간을 통해 감정을 이야기하고, 시간을 통해 사람을 연결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아주 조용한 여름날처럼 흐른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독자는 아마 책장을 천천히 쓰다듬을지도 모른다. 마치 자신의 오래된 사진첩을 본 듯한, 익숙하면서도 다시 떠올리고 싶은 감정이 남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여름날 저녁에 듣는 매미 소리 같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느껴지는 낡은 책상의 냄새 같기도 하다. 그렇게 이 소설은 말없이 오래도록 독자의 기억에 남는다. 현대 사회는 늘 빠르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요구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천천히 읽히고 천천히 스며드는 소설이 더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바로 그런 소설이다. 독자가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조용히 되돌아보게 만든다. 지금, 만약 당신의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된 교실 하나쯤 있다면, 그곳에 한 번 들러보길 바란다. 어쩌면 아직도 거기엔 누군가의 목소리, 웃음소리, 바람이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름은, 분명히, 오래 그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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